옛사진·추억

윤심덕님 / "사의 찬미"들어 보셧나요?

서병길 2013. 6. 17. 17:14

사의 찬미(死의 贊美)》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 8월에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발표한 음반이며 이 음반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타이틀곡은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이다.

한국어 가사는 윤심덕이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어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흔히 〈사의 찬미〉를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죽음을 찬미하는 내용의 가사처럼 이 노래를 부른 윤심덕이

곧 귀국길의 현해탄에서 연인 김우진과 함께 자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윤심덕-사의 찬미(1926)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건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이 노래는 윤심덕의 비극적인 동반 자살 이후 많은 인기를 끌었고,

자유연애 사조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잡았다.

본래 왈츠이기 때문에 경쾌한 곡조이나 느리게 연주하여 처연하고 비극적인 느낌을 살렸다.

1991년에 영화감독 김호선이 윤심덕과 김우진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이 노래의 제목에서 따온 《사의 찬미》라는 제목을 붙였다.

불꽃처럼 살다간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

관비장학생으로 동경대학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한 윤심덕은 김우진, 홍난파 등과 교류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펼치지만 염문설에 휘말려 크나큰 정신적 고초를 겪기도 한다.

결국 윤심덕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라도 한 듯 ‘사의 찬미’라는 명곡을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는 얘기다.

김호선 감독은 데뷔작 <환녀> 이래 각박한 현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 여성상을 묘사하는데 주력해 왔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유행가에 불을당긴 노래이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일본유학까지 마친
음악엘리트였던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유명한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같이 정사한 김우진이 작사한
허무와 염세로 가득한 노랫말을 붙여 취입한 것이다.

이 곡은 희망가와 크게 두 가지 차이가 있다.
희망가의 가사가 희망적인 것에 비해 허무, 염세주의의 가사였고
또 하나는 희망가는 무반주였지만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동생의 피아노 반주가 들어간 음악 이였다는 점이다.

김우진


윤심덕은 이 노래를 녹음한 직후
그의 애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귀국 길의 관부연락선 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자살한
스캔들로 조선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 센세이션으로 인해 그때까지 미미하기 그지없었던


축음기(하드웨어)와 음반 (소프트웨어)시장이
일거에 열림으로써 일본의 음반산업자본은
식민지 시장을 확보하는 교두보를 쌓았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투신자살은
당시의 봉건적 사회분위기에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유연애 관을 공공연하게 피력했던 매력적인 신여성,
그리고 이미 가정이 있는 와세다대학의 엘리트가 죽음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한 것,
그리고 그런 결단을 암시하는 듯한 <사의 찬미>의 비극적인 가사는
암울한 식민지의 대중들의 마음을 극적으로 달아오르게 했다

  • 현재글윤심덕님 / "사의 찬미"들어 보셧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