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진·추억

'개화기 한국 최초 얼짱

서병길 2013. 6. 17. 17:06

'개화기 한국 최초 얼짱


이번엔 '개화기 얼짱'이 등장했다.

최근 인터넷 포털 엠파스의 게시판과 블로그, 사진전문 사이트의 게시판 등에 '일제시대 장안에 이름을 날렸던 기생 장연홍'이란

설명이 붙은 사진이 급속히 퍼지며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흰색 한복 차림에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

짙은 눈썹에 순진해 보이는 눈, 도톰한 콧날과 작은 입술로

단아한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원래 개화기 조선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에 포함됐던 것.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의 모습이 네티즌의 눈에 띄어 이 사진만 따로 사이버상에 보급(?)되고 있다.

네티즌들은 "예전에 인기짱인 기생이었다는 데 정말 예쁘다.

우리나라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관련 검색어
기생동인지 장한, 장연홍,
박녹주, 강명화, 왕수복
1910년대 경성의 소문난 요릿집 명월관은 종로 거리에서 이색 이벤트를

펼쳤다. 우산을 받쳐든 꽃 같은 기생들의 행렬을 등장시킨 거리광고였다.

앞서 가던 나이든 기생이 선창을 하면 뒤따르던 어린 기생들이 화답을

했다. 우산 끝에는 “명월관에 꽃다운 기생 산홍이가 새로 왔으니

많이 왕림해 달라”는 내용의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여쁜 기생을 백주 대낮에 구경하게 된 횡재에 군중들은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기생 행렬을 따랐다.

1920~30년대에는 관광용 우편엽서에 기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기생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엽서는 인화과정에서

흑백사진에 색을 입혀 인기를 끌었다.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기생 자료수집 전문가인 이종호씨에게

관련 자료를 제공받아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조선의 기생조합을 대신한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은 요릿집에만 출입하지 않았다.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제품광고 및 잡지표지, 행사 포스터 사진, 미술대학 모델 등에도

기생들이 많았다. 라디오 음악방송에 출연하고 레코드 음반을 취입해 인기가수가 되기도

했다. 기생들은 손님들에게 “~합쇼”투의 경어를 썼고, 손님들은 “잘 있었느냐”는 식으로

하대했다. 그러나 요릿집 사람들이나 악사들은 기생들에게 깍듯이 “아씨”라고 불러주었다.

책엔 기생들뿐 아니라 당시의 풍물, 시대상이 풍경화처럼 담겨 있다.


▲ 일제시대 기생들의 모습. 배경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신월, 장연홍, 김영월, 최연연
‘복덕방 목침’ 같았던 육단 최남선, 거액의 수표책을 들고 다니던 영국신사 장택상, 붓을 입에 물로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쓰던 명필 송영기, 자신의 시 ‘논개’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자상한 시인 수주 변영로 등이 장안의 요릿집 단골들이었다.(이난향(1900~1979)의 회고)

1930년대 기생들은 1시간당 1~1.2원을 받았으며, 한 달 화대수입은 평균 200~300원을 웃돌았다. 당시 쌀 한 가마에 7~8원, 은행원 월급 70원에 비하면 ‘고수입’ 직종이었다.

‘스타 기생’도 탄생했다. 14살에 평양기생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장연홍(1914~?)은 요즘 인터넷에서 한창 뜨는 ‘얼짱’으로 손색 없을 정도의 미모로 찬사를 받았다. 취한 듯 쌍꺼풀 진 눈, 사람을 금방이라도 삼킬 듯한 미소는 ‘효리춤’ 이효리의 원조다.

기생들의 연애담은 장안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봄봄’의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은 판소리 명창 박녹주(1906~1979)를 짝사랑했다. 1928년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8도 명창대회에 참가한 박녹주에게 김유정은 열렬한 연애편지를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끈질긴 구애를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평양 기생 강명화(1900~1923)와 대구 부호의 아들 장병천과의 순애보는 불나비처럼 자신들의 몸을 등불에 던져버린 사랑이야기였다. 강명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급기야 23세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으며, 장병천도 그 뒤를 따랐다.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의 임종을 지킨 것은 30여장의 음반을 내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왕수복(1917~2003)이었다.

1927년 초에는 ‘장한(長恨)’이란 기생동인지가 창간됐다. 권두언에서 “웃고 살아도 부족이 많은 세상을 어찌하여 한탄으로 살까보냐.…기생도 사람이어니 영원히 눈물과 한숨만 벗을 삼을 것이냐! 그것을 원치 않거든 마음과 힘을 합치자”라며 기생의 권위회복을 주장했다. ‘외국인이 본 조선의 기생’ ‘내가 만일 손님이라면’을 특집으로 마련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기생은 전통 문화예술을 발전시킨 주역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조선 기생들, 동인지 만들어 여성 운동했다

일제시대 우리 기생이 만든 동인지 ‘장한(長恨)’ 창간호 원본이 발견됐다. 장한은 ‘화류계 여성’으로 치부되며 천대받던 기생들이

약 80년 전인 1927년 스스로의 권익보호를 위해 만든 잡지로, 창간호 원본이 언론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근대 기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서지영 연구교수(여성사)는 “장한의 존재와 단편적 내용은 관련 연구자 사이에 알려져 있었지만 원본은 보지 못했다”며 “장한은 기생이 직접 글을 써서 집단적으로 발간한 동인지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경희대학교의 최혜실 교수(국문학)는 “일제 때의 기생은 예술과 지조를 중시했던 조선의 기생에 비해 ‘웃음을 파는 꽃’으로 전락한 측면이 있다”며 “그랬던 그들이 사회에 대한 참여의식을 갖고 문화활동을 꾀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잡지 발굴에 의미를 둘 수 있다”고 말했다. 애호가의 개인서고인 서울 ‘아단문고’에서 이 잡지 창간호를 찾아낸 원로 출판인 최덕교(崔德敎·78)씨는 “소설가 최서해(崔曙海·본명 최학송, 1901~1932)씨가 장한의 편집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기생전'에 전시된 조선 기생들.
‘장한’ 창간호의 발간일은 1927년 1월 10일. 편집·발행인은 김보패(金寶貝), 인쇄인은 노기정(魯基貞), 인쇄소는 ‘한성도서’이고 발행소는 ‘장한사(長恨社)’다. 재미있는 것은 장한사의 주소가 ‘서울 관수(觀水)동 14-1’로, 당시의 대표적 요리집이었던 ‘국일관’의 주소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서지영 교수는 “국일관에서 자본을 댔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며 “발행인 김보패는 가명이거나 필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책 8쪽에는 ‘지분사광고모집(支分社廣告募集)’이란 사고(社告)가 있다. 지사와 분사를 공개모집한 점으로 미뤄 장한 편집진은 이 잡지를 지속적으로 발간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장한’ 2호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서 교수는 “책의 발행이 1회에 그치고 말았는지, 아니면 1호에서 발행이 끊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110여쪽에 달하는 이 책의 가격은 40전, 필진은 대부분 당시 이름을 떨쳤던 유명 기생이다. 소설가 김유정이 사랑한 여인이자 훗날 여류 판소리의 대가로 꼽힌 명창 박녹주(朴綠珠), 김월선(金月仙), 윤옥향(尹玉香), 김남수(金南洙), 백홍황(白紅黃) 등 소개된 40여편의 글 대부분이 현직 기생에 의해 직접 쓰였다. 책에 실린 내용은 사회비판, 기생 권익옹호 등 현실참여적 글에서부터 ▲내가 만일 손님이라면 ▲기생이 되기까지 ▲삶에 얽힌 회한 등 사적인 내용을 포함해 ▲미국·일본·중국인이 쓴 조선 기생에 관한 글 ▲단발·화장 등 패션정보 ▲외국배우 동정 ▲임질·매독·구강위생 등 건강관리 ▲유머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 잡지의 표지다. 장한 창간호는 표지 복판에 커다란 새장 속에 갇힌 채 웅크리고 앉아있는 기생 사진을 싣고 주변에 “동무여 생각하라, 조롱 속에(의) 이 몸을”이란 글을 적었다. 발간 취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편집진의 생각은 잡지 권두언(卷頭言)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권두언은 “웃고 살아도 부족이 많은 세상을 어찌하여 한탄으로 살까보냐 … 우리의 ‘장한’은 앞으로는 장한(長恨)이 없게 하자는 장한이다 … 이로부터는 장한이 없게 힘쓰자”고 밝혀 이 잡지가 기생의 권익향상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에 대한 소망은 김월선이 쓴 ‘창간(創刊)에 제(際)하야’에도 나타난다. 김월선은 “조선에서 기생은 하루바삐 없애야 하겠으며, 안해야 되겠다”라며 “사회제도가 이를 허락지 않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니, 그대로 계속하여 있기로 말하면 모든 점에 있어서 향상되고 진보되어야 하겠다 … 이와 같은 취지에서 문화적 시설의 하나로 … 잡지 장한을 발행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잡지 곳곳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기생 김채봉은 ‘첫소리’란 글에서 “사람으로서 사람의 부속물이 되어 있다 하면 그 얼마나 모순된 현상인가”라고 사회를 비판한 뒤 “모순인 차별의 계급관념을 타파하고 자유평등을 구하는 애원의 소리 속에 끓는 피가 가득히 숨어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며 신분해방을 주장하고 있다. 또 당시의 명기 김남수는 ‘온돌야화(溫突夜話)’란 글에서 “만연하는 향락주의와 물질주의가 사랑의 열정을 식게 한다”며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당시 세태를 비판했다.

책의 또 다른 특징은 곳곳에 기생들의 신세 한탄이 보인다는 점. ‘울음이라도 맘껏 울어보자’는 글을 쓴 기생 매헌(梅軒)은 “세상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 떠나고 오직 조롱만이 남았을 뿐이로다”라며 “선배들은 천추에 원한을 머금고 다시 못올 길을 스스로 취한 자 그 얼마나 되는가”라며 처지를 원망했고, 또 다른 기생 김일련(金一連)은 ‘기생 노릇은 일생의 액운(厄運)’이란 글에서 “기생제도가 지상에 있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며 “어서 벗어나야 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기생들은 ‘내가 만일 손님이라면’이란 글을 통해 “차별없이 대하겠다”(홍도) “보통 인간으로 대해줬으면 좋겠다”(일기생·一妓生) “동정으로 대하겠다”(비취) 등의 생각을 밝혀, 기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철폐되기를 희망했다.

잡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당시 기생의 충원과정을 볼 수 있다. “대구 읍내에서 서쪽으로 한 이십 리쯤 되는 조그만 농촌에서 자랐다”는 기생 이월향(李月香)은 “열두 살 먹던 해에 꼬임을 받아 악마굴에 끌려가 깨끗한 몸을 하룻밤 사이에 더럽혀버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생생활이란 것이 참 못할 것인 줄 깨달았지만 양육비라는 것 때문에 함정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이 사실이라면 10대 초반 소녀를 상대로 기생을 모집하는 브로커가 존재했고, 당시에도 지금처럼 ‘양육비’를 빌미로 기녀가 기방을 벗어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경상도 대구가 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또 다른 기생 백홍황은 “아버지가 어지간히 큰 드팀전(비단가게)을 하셔서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귀한 집 무남독녀로 남부럽지 않게 풍유하게 자라났다”고 적었다. 백홍황은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장사에 실패를 하셔서 살던 집이며 추수해 쌓아놓은 곡식이며 의복을 넣어둔 장이며 하다못해 벽에 걸린 시계까지 모조리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며 “저의 힘으로 어머니 아버지를 안일하게 살게만 할 수 있다면 기생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할 생각이 들었다”라고 기생이 된 동기를 적었다.

기생들은 당시 일부에서 선을 보였던 ‘단발(斷髮)’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단발에 대한 기생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던 듯싶다. 그것은 책 16쪽에 실린 ‘여자의 단발’이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ㅎ·ㅈ·ㅋ’이란 필자는 “독일에선 여자의 단발을 ‘루비-곱’이라 부른다”며 “구미제국을 보면 상류사회와 건실한 가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가 이 ‘루비-곱’이 되어있다”고 적어놓았다. ‘ㅎ·ㅈ·ㅋ’은 “전후의 고려도 없이 유행만을 따라서 단발을 하는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참으로 유감천만의 한사(恨事)라 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오므브’란 필자는 ‘기생과 단발’이란 글에서 “기생 중에서 제일 먼저 머리를 자른 이는 강명화(康明花)일 것”이라며 “강명화는 여러가지 파란 곡절로 단발을 한 것”이라고 적었다. ‘오므브’는 “우리나라 여자는 본시 머리털이 여자의 생명으로 알아왔으며 또한 동양의 여자의 체격상으로도 머리를 자르고 다니는 것이 그 얼마나 미태(美態)를 손모하는가 함은 누구를 물론하고 다 아는 바”라며 “단발을 하여 아름다운 태도를 없게 한다 함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재미없는 일이다”라고 단발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또 다른 기생 엄산월(嚴山月)의 생각은 더 강했다. 그녀는 ‘단발과 자살’이란 글을 통해 “자살이나 단발은 그 순간의 착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라며 “다 저의 자유에 있을 것이나, 단발을 하는 것이나 자살을 하는 것이나 결행하기 전에 먼저 냉정히 자기 자신의 환경과 처지를 생각하여 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순서가 아닐는지”라며 단발을 자살에 비유했다.